농촌 지역의 가난한 여성들은 하녀로 일했다. 어떤 여성들은 개인 집에서 일했고 어떤 여성들은 교구 사제나 유족한 농민의 하녀나 정부가 되기도 했다. 선술집이나 여관을 경영하거나 농민에게 술을 파는 여성들도 있었는데 때론 여성들이 이자를 받고 돈을 꾸어줄 만큼 장사가 잘되는 곳도 있었다. 여성들은 산파로 일도 했고 전문 의료인이 올 수 없었던 농촌 지역은 산파들이 의술을 시행하기도 했다.
법정 기록에는 여성들이 유산이든 과부 재산권이든 토지를 보유할 수 있는 권리를 누렸다. 토지를 새로 매입한 여성, 자녀의 후견을 한 여성, 혼인법을 위반한 여성들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중죄는 영주 법정이나 왕의 법정에서 재판되었다. 두 가지 유형의 법정 기록부는 농촌 노동에서 여성의 역할 남자들과의 관계, 폭력 사건, 여성들과의 관계 등을 부분적으로 보여 준다. 여성들이 고발당할 경우 법정에 출두하여 보증하거나 여성들이 재판에 출두하지 않은 벌금을 내는 것은 대부분 남자였다. 여성은 법원에서 선서할 수 없었다는 것이 이유 중 하나였다.
잉글랜드에선 도시와 같이 여성들이 양조법 위반으로 고발당한 기록들이 있다. 주류 감정인에게 먼저 검사를 받지 않고 술을 파는 것, 당국의 용량 검사를 받지 않은 용기에 술을 담아 파는 것, 질이 낮은 술을 파는 것, 정해진 값보다 비싸게 팔거나 싸게 팔아도 위반 행위였으며 공인된 계절보다 이르거나 늦게 파는 것도 위반 행위였다. 벌금이 하도 자주 부여하다 보니 세금으로 여겨질 정도였고, 이렇게 많은 여성이 위법하여 벌금을 낸다는 것은 여성들이 양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여성들은 가축을 남의 땅에서 풀을 뜯게 하거나 허락 없이 숲에 들어가 나무가지를 쳤다는 것도 고발당한 이유였다. 여성들은 종종 남의 땅에 침범하여 싸우는 일도 있었다.
남녀 모두가 폭력과 욕설을 하면 고발당했다. 한 장원의 어떤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때리고 자기를 집에서 쫓겨났다고 고발했지만 거짓 고발로 벌금형을 받은 사례도 기록되어 있으며 여자들이 분란에 휩쓸려 욕설을 하는 것은 자주 있었으며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창녀", "마녀"와 같은 말을 했다. 여성의 신체적인 연약함은 약점이 됐지만 도시 여성이든 농민 여성이든 이런 약점 때문에 순종적이지는 않았다.
가난한 계층에서는 여성들은 좀도둑질로 고발당하곤 했는데 주로 음식, 가사용품, 의복 등이었다. 살인죄로 고발당한 예는 극히 드물었다. 드물게 살인죄로 고발당한 여성 중엔 단독 범행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공범이 있었다. 연인과 짜고 남성을 살해한 죄로 고발당하기도 했고, 상습적으로 강도질하는 범죄자와 일당인 여성들도 있었다.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주가 소작인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땐 여성들이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농촌 지역의 여성들은 일할 때, 여가일 때 방앗간이나 개울가 등에서 함께 어울려 다닐 수 있었다. 몽타이유 농민들은 화롯가에서 대화를 즐겼고 여자들끼리 따로 모여앉아 시간을 보냈고 음유시인이나 방랑 가객들이 마을 장터에 왔고 그들의 공연을 구경했으며 그들은 여자들의 관심과 순박함을 이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성들은 집이나 술집에서 남성들과 술을 마셨다. 영주가 농민들의 불필요한 출입을 단속해야 할 장소 중 하나는 장터의 선술집이었다. 한 시인은 여자들이 술을 사기 위해 저당 잡히는 직조 도구나 옷가지를 열거하기도 했는데 언급된 옷가지는 대부분 남성의 것이었다고 한다. 결혼이나 축하 행사들은 술을 편히 마실 기회가 되었다.
다양한 축제일들은 많았으며 축일들은 대개 농사 절기나 그리스도교의 연관된 것이었다. 잉글랜드에서는 기념일인 호크데이 전날 밤은 마을 여자들은 남자들을 잡아 몸값을 받고 풀어주었으며 그다음 날은 남자들이 여자들을 붙잡아 몸값을 받고 풀어줬다. 주교의 금지령 덕분에 알 수 있는 축제들도 있다. 잉글랜드 마을에선 마을에서 가장 예쁜 처녀를 5월의 여왕으로 뽑아 화환을 둘러주는 풍습도 있었다. 젊은 남녀들은 성직자들이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모여 춤을 추었다. 교회 앞에서 춤판이 벌어지기도 했고 노래와 게임을 포함한 야간 축제하는 동안 행사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유럽의 마을에선 사순절 기간의 첫 번째 주일 저녁에 무도회가 열렸다. 남녀가 촛불을 들고 포도원과 들판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나무를 해치는 역병들을 쫓는 주문을 외우는 축제였다.
여자들이 교회에서 설교를 듣지 않고 떠든다는 것을 특유의 죄로 꼽는 설교자들도 있었다. 몽타이유에서는 성직자들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을 남자들이 강하게 나타냈다. 성직자들은 작물뿐 아니라 가축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거두며 농민을 착취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성인 중 농민으로 태어난 이는 기록에 별로 없지만 13세기 마르게리타 다코르토나 라는 농민의 여성은 귀족의 정부였으며 그는 아들을 낳았다. 남편이 죽은 후 그녀는 세상사를 저버리고 신앙에 전념했다. 그녀는 프란체스코에 들어가 자선을 베풀고 죄인들을 회개시켰다. 말년을 은둔 수녀로 보낸 그녀는 그녀가 죽은 직후부터 그녀를 성인으로 받들었다. 몽타이유에서는 시신이 매장되기까지 밤샘을 하고 시신을 씻기고 수의를 입혀 장례를 준비하는 것도 여성들의 일이었다. 그의 사후에 축복이 그의 집을 떠나지 않도록 그의 손톱이나 머리카락을 잘라 집에 간직하는 관습을 지키는 것도 여성들이 나서서 했다.
농촌 소녀들이 교육받지 못한 사실은 자신들의 지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농민 사회에서 남성도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농촌 공동체에서 직임을 받지 못하거나 성직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은 교육의 결여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녀들은 기회가 없었다. 농민 남성들은 교육받으면 자기의 현재 계층에서 벗어날 기회는 있었지만 여성에게는 가능성이 없었다. 때론 여성들이 우연한 기회로 수도원에 들어갈 순 있었지만 수녀가 되어도 성직은 맡을 수 없었다. 귀족 여성들은 봉토를 계승하고 지배권을 행사했지만 개인으로서 자신의 봉토에서 지배권을 행사할 뿐이었다.
농민 여성과 가장 비슷한 신분은 도시 노동자 계층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도시 여성은 농민 여성에 비하면 훨씬 제한됐다. 그녀들은 도시적인 특징 활동으로 소규모 상업뿐 아니라 외국과의 교역, 재정 거래 등 아무 역할을 못 했지만 농민 여성은 모든 농사일에 참여했었고 남녀 노동 분화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농민 남성의 권리와 대등하지 않았다. 여성들이 활동한다는 것은 활동의 자유를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지만 권력을 휘두르는 건 남성이었다.
여태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을 살펴보았어도 여성의 권리는 남성의 권리와 대등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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