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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 여성의 모습

중세 시대 여성의 노동1

by 정유이레 2022.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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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농민 계층에서는 여성들도 농사일을 했다. 딸과 아내는 가족의 농토에서 일했고, 과부는 자신의 토지에서 경작했다. 영주 직영지가 있는 지역은 영주가 요구하는 인력을 제공하며 일했다. 과부들에게도 장원에서 모든 노역을 도와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많은 여성은 농사꾼이나 부유한 농민의 집으로 들어가서 여러 가지 일을 맡아서 했다. 밀을 까기도 했고, 물레질하기도 하고, 추수꾼에게 새참을 나르기는 일도 하고 돼지 도살을 돕기도 하는 일도 했는데 역사서에서는 한때는 농민 여성들이 가내 노동인 집안일, 텃밭 가꾸기 등만 했었다고 기록된 일이 많았다. 실제로는 남자도 목장에서 일했지만 여성들도 들판 등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었다.

가내 노동이라고 하지만 집안일과 텃밭 가꾸기 외에 세탁과 요리, 치즈 만들기, 술 빚기 등은 기본이었으며 그 외 물 길어 나르기, 화덕에 불을 지피는 일, 방앗간에서 밀 찧어오는 일, 가축 돌보기 등 힘쓰는 일도 해야 했으며, 술은 집안사람들이 먹을 것뿐만 아니라 내다 팔기 위해서 빚어야 했다. 천을 짜는 것도 여성들의 일이었는데 양이 있는 지역에서 양모로 실을 잤고 모직 천을 짰다. 마를 경작하는 지역에서는 마를 재료로 일했고 일반적으로 천을 만드는 데는 여성들이 노동했는데 염색 같은 다른 공정도 도맡아서 했다. 부유한 농민들은 집에서 천을 짜지 않고 시장에서 천을 샀다. 실잣기와 베를 짜는 일은 여자 노역들이 영주를 위해 하는 전형적인 가내 노동이었다.

들판에 나간 여성들은 잡초 뽑기, 괭이질, 씨앗 뿌리기 등을 하며 수확 때엔 곡식단을 묶고 키질도 하며 건초를 모았다. 잉글랜드에선 남자가 쟁기를 끌 때 여자는 밀과 쭉정이를 구별하기 위해 써레를 사용할 때 가축을 몰았다. 법정 기록부에서 농민 여자가 논갈이를 하는 동안 한 농민이 써레에 매인 말의 고비를 잘라버린 일로 고소된 기록도 있다. 잔다 르크는 재판 때 자신이 부모의 집에서 물레질이나 바느질 같은 가내 노동과 아버지와 함께 쟁기질한 적이 있다고 증언한 기록이 있다. 20년 후 재심을 위해 마을을 찾아온 심문관들에게 그녀의 고향 사람들은 증언을 고스란히 반복해줬다. 14세기 후반은 인구 감소로 노동력이 부족할 땐 여성 노동자들이 거름 주는 일이나 이엉 엮기 등도 했으며 양을 씻기고 털을 깎았다. 

법정 기록에선 여성 토지 보유자 중에는 유산이나 과부 재산으로 땅을 보유했을 뿐 아니라 땅을 매입한 이들도 있었다. 이는 그녀들이 토지를 보유하고 경작하면서 모든 의무를 수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독립적인 여성의 본보기가 된 몽타이유 출신의 농민 여성이다. 그녀는 카타리파였으며 이단 재판을 두려워해 고향을 떠났다. 그녀는 산테마오로 이주했다. 집과 포도원이 있는 농장, 노새와 양을 매입햤고 가내 작업장에서 양모를 염색했다. 수확기 동안에는 품꾼을 고용해 자식들과 함께 일하며 정직하게 얻은 성공과 더불어 자기에게 양을 맡긴 친척을 속여 재산을 늘렸다. 그녀는 친척에게 양모값과 100마리가 넘는 양의 털가죽을 속여 뺏었다. 

자기 땅에서 경작하고 의무를 다하며 노동으로 번창한 여성들이 있지만 자신의 무거운 의무에 쓰러진 여성들도 있었다. 한 과부가 자신의 땅을 지켜낼 힘이 없어 그것을 손녀와 손녀 남편에게 양도하는 대신 과부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주기로 법정에서 선언했다. 이런 사례들이 번번이 있었다.

농민 여성들은 시장에서 농산물을 팔기도 하며 닭이나 돼지를 치는 일, 낙농장에서 버터나 치즈나 크림을 뜨는 일 등 남성이 하는 일을 여성이 맡아서 했다. 올바른 농장 경영에 대한 지침서에는 낙농장의 감독이 남자라면 여성 감독이 하는 모든 업무와 여성에게 주어진 지침들을 대부분 수행해야 한다고 쓰여 있다. 낙농장 감독은 아주 많은 일을 해야 했는데 그중 다양한 콩과 곡물의 키질도 포함되었다. 어느 정도 전문성도 필요했고 보조 일꾼들을 감독해야 했다. 농장 경영 지침서에는 청결, 책임감, 정직성, 농기구를 세심히 관리해야 하는 꼼꼼함 등을 필요 자질이라 열거했다. 14세기 인구감소일 시기 노동자들의 최고 임금을 왕령에서 선포했을 때 여성들도 모든 농사 일에 종사했다는 것이 기록되었다. 또 광산에서 여성들이 납을 씻어 여과기에 거리는 일도 했다. 여성들은 도로 보수를 위해 돌을 자르는 일을 하기도 했다.

여성 임금은 남성의 임금보다 적었다. 잉글랜드 저자가 쓴 농업 경영서에는 낙농장이 없는 영지에서도 가축을 돌보고 키질하도록 여성을 고용하는 편이 낫다고 쓰여있는데 그 이유는 입금이 낮기 때문이었다. 남녀 임금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여러 기록에 남아있다. 프랑스에서 여성의 임금은 특히나 낮았다. 흑사병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고 기록되었다. 프랑스 땅은 전란으로 많이 피폐해져 노동력보다 생산이 더 저하되다 보니 급여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1350년 때까지 프랑스 여성의 평균 입금은 같은 노동을 한 남성의 60%밖에 안 됐다 한다. 그 후 임금이 인상되어 1400년까지 동종업계 남성의 75%를 받았는데 임금이 인상되긴 했지만 남성 임금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잉글랜드에서는 흑사병 이후 남녀가 대등한 임금을 받았던 사례들이 발견됐다.

급한 일로 고용된 노동자들은 정규 노동자들보다 임금 협상에서 유리했다. 정규 노동자의 경우에도 남녀임금의 격차는 있었지만 여성의 지위가 일시적으로 높아졌던 때는 예외적인 기간이 되었다. 프랑스와의 대조적으로 프랑스는 생산이 저하로 임금이 낮았지만 잉글랜드는 자국 땅의 전쟁이 아니었으므로 생산에 비해 노동력이 감소했다. 그래서 여성의 임금이 특히나 올랐던 적이 있다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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