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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 여성의 모습

중세 농민 여성 결혼과 어머니와 과부

by 정유이레 2022.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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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엔 수명이 길어져 자녀들은 상속하기까지 오래 기다려야 했고 자녀 중 살아남는 수도 많아져서 모든 자식에게 밑천을 제공하기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미룬 경우가 많아졌다. 농민들도 남자가 가정을 이루려면 밑천이 있어야 했었다. 유족한 농민들은 고향에서 터를 잡는 경우가 더 많았고 결혼을 일찍 했다. 아주 가난한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타지로 나가 살길을 찾아야 했다. 흑사병이 지나간 후로 빈 땅이 늘어나 땅을 사기가 전보다 쉬워진 탓에 결혼연령이 낮아진 지방도 있었다. 20세기 남성 평균 연령은 20세였고 여성은 더 낮았는데 12~20세 사이에 결혼했다. 

마을 처녀들은 거의 결혼했고,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은 대부분 마을을 떠나 도시로 나가 하녀로 일하거나 다른 마을에 가서 품 팔아 농사일을 했고 사생아를 낳을 가능성이 높았는데 일부는 마을로 돌아와 사생아를 키우며 결혼하기도 했다. 

유족한 농민 가정은 가난한 농민 가정보다 자식을 더 많이 두었다. 이런 자녀 수의 비례는 잉글랜드 다른 영지에서도 나타났다. 흑사병 이후로 또 다른 역병으로 인구수는 더 줄었다. 

 

 

어머니의 역할

문학에선 농민 계층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법정 기록부에 기록된 것은 예외적인 사례들뿐이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농민 여성들은 자녀에게 직접 젖을 먹이고 손수 키웠고 아동기는 짧았다.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했고, 각자의 사회에 들어갔다.

잉글랜드에 기록된 일들을 보면 농촌 지역에서 유아 및 영아를 소홀히 취급되어 사망한 일들을 보여준다. 아기들은 종종 할머니에게 맡겨졌고, 이들은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아이들은 커가면서 움직임이 많아지며 우물, 연못, 강 등에 빠져 죽거나 화상을 입거나 상처를 입었다. 사고 자체는 아이들을 소홀히 다루어졌다는 사실을 나타내지만 유대관계가 없었다고 말할 순 없다. 

농민 가정을 묘사한 작품 중 부모의 사랑에 대한 작품이 있다. 하르트만 폰 아우가 쓴 책의 내용은 영주의 나병을 고치기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농민 소녀가 나온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의 뜻을 알고 말리지만 딸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알았고 그녀는 부모에게 용서를 구하고 부모에게 감사와 사랑을 표하고 나서 소녀의 뜻대로 하는 것을 허락받는다.

몽타이유의 농민 자료에서는 농민들은 어린 자식에 대한 강한 애정과 배려가 보였다. 농민 여성은 귀족 여성이나 도시민 계층의 여성들과는 달리 자기 자식에게 직접 젖을 먹였다. 아이들은 모유를 먹으며 컸으며 그들은 친밀하고 직접적인 관계였다.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소녀였던 푸셀은 사생아를 낳았는데 이웃 여자가 자기 집에 사는 한 여자가 젖이 남는데 아이에게 먹일 수 있다고 강하게 권해 어쩔 수 없이 동의했지만 낯선 여자의 젖이 아이에게 해로울까 봐 걱정되어 남의 집 하녀나 품팔이 일꾼을 하며 딸을 자기 곁에 둘 수 있도록 했다.

어느 시대에나 재산은 분란의 이유가 되었다. 자식이 잘되는 것보다 본인들의 욕심을 채우는 이기적인 부모들도 당연히 있었다. 잉글랜드의 한 과부는 어린 아들과 세 딸과 함께 남게 되자 딸들을 결혼시키기보다 자기가 재혼하는 것을 더 서둘렀고, 첫 남편이 죽은 후에 두 번이나 더 결혼했다.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은 재산 중에 의붓딸 중 하나에게 돌아갈 몫을 자기가 차지하려고 했고 이뿐만 아니라 혼인 지참금을 주지 않아 결혼할 수 없던 딸들은 사생아를 낳았다. 

설교자들은 자식을 소홀히 하는 부모들에게 훈계했고, 사제들은 자식을 그리스도교인답게 키울 의무를 상기시켰다. 자식들이 연로한 부모를 존대하지 않고 돌보지 않으면 자기 자식들로부터 똑같이 푸대접받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아이를 죽인 어머니들의 사례도 있다. 잉글랜드에서는 화가 나 10살 아들을 때려죽인 일로 고발당했고 또 다른 기록은 2살짜리 딸을 죽이고 4살짜리 아들에게 숯 위에 앉으라고 강요도 했다. 법정에서 이 여자들의 행동은 정신이상으로 결론 냈다.

 

어린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따뜻한 애정과 표현은 중세 농민 계층의 특징이었으며 상류 계층에선 오히려 나중에 발전됐다 한다. 자식에 대한 태도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어린아이를 중요시하는 태도는 특징인 오늘날에도 보인다.  

 

 

 

과부

나이 든 과부들은 도회지로 이주한 이는 농촌 지역이 과부 수가 더 많았을 것이라 추정한다. 잉글랜드 중부에 있던 10개 장원에 관한 기록을 보면 토지 보유자의 14%는 여성이었고, 과부가 반 이상이었다. 

다른 사회 계층에서와 같이 농민 계층 과부들의 권리는 교회와 세속법과 관습에 의해 보장되었으며, 이런 권리는 과부 재산 및 자녀에 대한 후견권에 관한 법률 반영이었다. 지역마다 과부의 재산 권리는 달랐고, 토지 자산을 일부만 받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전부 상속받는 지역도 있었다. 서섹스 지방은 과부가 죽은 남편의 토지의 절반을, 나머지 반은 막내아들이 받았는데 과부가 재혼할 경우 그 토지는 박탈당했다. 아내가 먼저 죽고 그녀의 남편과 자식이 있다면 대부분의 지방에선 홀아비는 그녀의 토지를 종신 소유할 수 있었다. 그가 죽고 나면 상속인에게 넘어갔다. 만일 자식이 없다면 그녀의 친족에게 넘어갔다. 남자가 과부와 결혼한 후 그녀가 먼저 죽는 경우 그녀의 유산 일부는 가질 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녀가 첫 결혼에서 태어난 장자에게 상속되었다.

많은 과부는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고 과부 재산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종종 그 권리를 지키기 위해 남편의 친족들과 법정에서 싸워야 했었다. 과부 재산은 가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여 자식들의 몫이 적었고 재혼할 땐 자식들의 몫을 차지하려 한 일이 많았다. 또 과부는 자식들에 대한 후견권을 얻는 대가를 지급해야 했다. 

어떤 과부들은 재혼하지 않고 보유지를 혼자 경작했다. 어떤 과부들은 자기 재산의 권리를 자식에게 넘기며 자식은 그 대가로 모친 봉양을 약속했다. 어떤 과부들은 재혼했다. 과부들이 청혼받는 이유는 주로 유산을 물려받았거나 관습에 따라 과부 재산으로 보유한 것을 계속 보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흑사병 이후 버려진 토지가 늘자 과부들의 재혼율은 낮아졌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영주 직영지에선 자신에게 봉사와 노역을 할 자원들을 확보하기 위해 과부에게 재혼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과부는 재혼을 미룰 수 있도록 영주에게 대가를 상납하기도 했다.

대부분 지방의 농민 사회에서 가장 큰 자유를 누리는 건 땅을 가진 과부였다. 재산은 지위와 세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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