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올가는 루스의 초기 통치자 중 한 명이다. 10세기 경이였다. 루스는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국가들의 공통된 역사적 출발점에서 시작했다. 이 국가를 세운 사람이 노르만인인지 슬라브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주장은 계속 대립하고 있다. 키예프 국의 무관심한 지역은 루스라고 불렸다.
루스의 첫 문헌 자료엔 올가의 행적에 분량이 많다. "네스토르 연대기"라는 명칭이 생길 정도로 1110년대 동슬라브인들의 역사의 다양한 자료를 간직하고 있다. 올가의 기록은 비슷한 시기에 역사적 기록만 적은 것이 아니라 다른 기원의 전설이 섞여 들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올가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크게 남편 이고리가 사망한 후 남편의 복수를 하는 과정과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에게 환영받고 세례를 받는 것으로 나눠진다. 그 외에 그녀의 통치와 지역 근방 부족과의 관계에 기록되어 있어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여성" 올가의 기록에 대해선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올가의 전술이 위대하고 똑똑하고 대담한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7~8세기 동유럽 평원에 여러 부족이 반 유목, 반 농경의 형태로 살고 있었다. 이들은 교역도 하고 전쟁도 하면서 공존하며 중부 유럽 지역과도 교류했다.
9시기 후반 강한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들이 동유럽 평원으로 이주해 국가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사실 동로마로 교섭하러 왔다 일부는 물을 따라 내려갔고 일부는 기후 좋은 키예프를 장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스족에 속하는 일부는 러시아 땅으로 이주했으며 이들의 부족 이름인 루스가 나라 이름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국가를 키예프 루스라고 부른다.
바이킹들은 이 시기에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바다를 통해 세력이 커졌고 브리튼 섬 일부와 프랑스 서부 해안을 점령했고 노르망디의 지배 권력을 장악하며 동로마 제국의 비위를 거슬리게 행했고 12세기엔 이탈리와 남부에 왕국을 형성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역사를 최초 기록한 책에는 올가는 이고르의 부인이며 류리크의 며느리였는데 류리크는 루스 3형제의 맏형이며 루스의 통치자 가문의 시작이었다. 그의 아들 이고르와 친척 올렉과 함께 키예프에 장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올렉은 지혜 있는 사람이었고 키예프로 내려온 이고리를 가르치며 키예프 국의 기반을 마련하고 세력의 도움을 받고 다스렸다 한다. 이고리는 올렉의 말을 순종하고 올렉이 사망한 후 키예프의 통치자가 되었다.
올가는 903년 그와 결혼했고 출신 계급은 알 수 없다. 올가와 이고리는 외동아들 슬라프를 낳고 별 탈 없이 결혼 생활 했지만 이고리의 죽음으로 올가의 삶은 변했다. 어린 아들을 대신해 키예프를 통치하며 정치적, 군사적 변화에도 대처하며 상황을 정리해 나갔다. 올가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역사적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다
남편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네 번 한 여자
이고리는 끊임없는 무력 전투를 하며 조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드레블랴네인들에게 죽임당했고 그들의 영지에서 그들에게 묻혔다.
올가는 그의 죽음으로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에 올랐으나 조언자와 군사 지도자가 그녀를 보좌했다. 이 상황에 드레불랴네인들은 자신의 통치자와 올가의 결혼을 추진했다. 이 청혼을 계기로 올가는 남편을 죽인 이들에게 복수할 수 있게 됐다. 그들은 스무 명의 사절단을 배에 태워 강을 따라 키예프 근처 보리체프에 도착했다. 당시 키예프 주민들은 강의 범람을 피해 언덕 근처에 지냈는데 궁정도 그곳에 있었다. 올가는 정중히 예를 갖춰 사절단을 맞이했고 그들의 방문 사유에 주민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싶다고 양해를 구하며 그들이 배에서 기다리게 했고 다음 날 그들을 배에 태운 채 구덩이 속으로 던지고 생매장했다. 그레블랴네에선 이 사실을 몰랐고 올가는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 높은 사람들을 자기에게 보내 맞이하는 예를 갖추어 달라고 했다. 그들은 올가의 말을 듣고 그들 중 뛰어난 사람들을 올가에게 보냈다. 올가는 그들을 예를 갖춰 맞이했고 목욕을 한 후 대화를 나누자 청했고 그들은 그녀의 말을 듣고 욕탕에 들어갔는데 올가는 밖에서 문을 잠그고 불을 질러 그들을 처리했다. 그다음으론 자기 남편 무덤에 장례를 치를 테니 많은 양의 꿀술을 준비해 달라 청했다. 그들은 꿀을 모아 많은 양의 술을 빚었고 올가는 몇 명의 수행원만 거느리고 성대한 장례 의식을 치렀다. 장례 의식에 참여한 드레블랴네인들은 거나하게 취했고 그 틈에 수행원들이 살해하게 두었다.
다음 해 올가는 어린 아들과 함께 큰 군대를 갖춰 드레블랴네인을 공격했고 1년이나 도시를 포위하고도 함락이 되지 않자 올가는 그들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바쳐 평화롭게 지내자고 권유했다. 오랜 포위로 그들은 가난해졌기 때문에 조공은 비둘기 세 마리와 참새 세 마리로 조공을 권했고 그들에겐 관대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올가는 군대 병사들에게 유황 조각과 작은 천을 매달고 그들을 자기 집에 가도록 날려 보냈다. 새들은 마을로 날아갔고 마을은 모두 불탔다. 사람들이 도망쳐 나오자 일부는 죽이고 일부는 노예를 삼았다.
이렇게 위협을 막아내고 복수를 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생각이 들지만 올가의 복수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역사적 일인지 아니면 올가라는 현명한 여성의 이미지 위에 덧붙여진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다.
올가의 네 가지 복수
첫 번째 복수: 배에 있는 원수를 태운 채 생매장
두 번째 복수: 목욕 중 건물을 불에 태워 적군을 몰살
세 번째 복수: 잔치를 베풀어 접대한 후 몰살
네 번째 복수: 새를 통해 큰불을 내어 마을을 몰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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