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모든 도시에서 여성들은 세탁부, 목욕탕 조수로 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비뇽에서 유명한 채식사와 함께 일한 여성 채식사와 파리의 여성 채식사 등이 눈여겨볼 만하다. 여성 작가 크리스틴 드 피장에 의하면 "그녀가 내 책을 위해 채식을 여러 번 해 주었기 때문에 안다."고 덧붙였다. 이 파리의 여성 채식사는 남성 채식사들보다 훨씬 더 재주가 뛰어났지만 보수는 적었다고 한다. 또 흔치 않게 파리의 왕실 음유시인을 이끄는 가수와 약사의 길드에도 여성 회원들이 있었다.
그밖에 여관이나 선술집, 가게나 가판대, 시장이나 장터에서 음식 장사를 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혼자 일하는 여성도 있었고 소규모로 장사를 하는 장사꾼 남편과 같이 일하는 여성도 있었다. 유제품을 파는 여성, 생선과 해산물을 파는 여성에 대한 언급도 기록에 남아 있었고 파리에서는 많은 여성이 헌 옷에서 각종 의상과 섬유에 이르러 옷을 만들고 파는 일을 했음이 납세자 장부에서 알 수 있다.
노리치에는 밀을 거래하는 여성이 있었고, 해외 무역상의 과부 중에서도 남편과 같이 일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과부 앨리스란 여성은 1370년 런던 법정에 청원 내어 집행관이 다른 사람의 소유물로 간주하여 압수한 배의 화물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며 자기주장에 대한 증거를 제출해 법정은 화물을 돌려준 기록이 있다. 또 코벤트리의 한 여성은 에스파냐 사람들에게 물품을 강탈당하자 다른 에스파냐 사람들의 화물을 압수할 허가를 얻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몫보다 더 많은 화물을 압수했고, 그 결과 에스파냐 사람들이 그녀에 대한 항의를 제기했다. 1318년 스코틀랜드 전쟁에 왕에게 거액을 빌려준 부유한 상인의 부인은 남편이 죽은 후에도 그가 하던 사업을 이어갔지만 여러 차례의 청원에도 남편이 받아야 할 돈이 지불되지 않아 그녀는 왕에게 돈을 받는 대신 자신이 수입하려는 양모에 대한 세금 면제 요구를 했다. 그녀와 같은 여성들이 더 있었다는 건 1274년 "백호 명부"에 나타나며 이 명부에는 큰 양모상 중 런던의 몇몇 과부들이 대규모 교역에 종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한 여성은 잉글랜드에 수출하는 양모의 공인 중개상으로 언급되고 있다.
위에 언급한 여성들은 과부들이었다. 이렇게 남편의 일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에서 소규모 장사를 하는 과부들도 많았다. 마저리 켐프는 대규모 상인 중 한 사람의 아내였다. 그녀는 처음엔 양조장을 운영했고 나중에는 밀 방앗간을 운영했다. 그녀는 활동하고자 하는 욕망이 컸다. 슬하에 자식이 14명이 있었는데도 집 밖의 일거리를 원했던 그녀였다. 런던의 실크 제조는 상인 아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남편들은 원료를 가공하는 일을 했다)
소매업에 종사하는 몇몇 여성은 소상인 길드의 회원이었지만 대규모 소매상 길드에 여성 회원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어떤 도시들에선 여성들이 길드 회원 자격을 자식에게 넘겨줄 권리가 종종 폐지되었다.
여성의 경제 활동의 권리는 도시마다 달랐다. 파리에서는 여성이 중량을 측정하는 일을 할 수 없었지만 런던에서는 여성들이 실크 무게를 측정하는 일을 맡았다.
여성 상인들은 소승을 내거나 당할 수 있었는데 그리되면 상업적 활동과 수입에 대한 책임이 면제되어 남편들에게는 이익이 되었다. 또 여성 상인이 기혼일 경우 완전한 독립성을 부여해 주었다. 이런 독립성은 모든 유럽 도시에서 인정되었다.
교훈서 저자들은 여성을 도시의 노동력으로 언급하는 것도 종종 발견되었는데 하녀, 여성 이발사, 여성 제빵사, 여성 여관 주인, 여성 잡화상, 여성 거지까지 논의의 대상이 됐다. 그들은 여성의 경제 활동보다는 정숙함과 남편에 대한 의무에 중점을 두었다. 반면 신분 문학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여성은 도시의 수공업과 상업에서 역할이 컸다. 그런 그녀들은 남성들처럼 자유롭게 직업을 택할 수는 없었다. 길드에서도 여성을 아예 받지 않았고, 어떤 길드는 여성에게 제한을 두었으며, 또 어떤 길드는 급여를 주고 여성을 고용하는 것이 금지였다. 남성과 같은 직종에서도 여성들은 늘 차별당했다.
일부 길드들이 여성을 배제한 이유는 성적인 정숙을 위한 것이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잉글랜드에서는 여성들이 여러 직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여성의 다재다능함이 인정됐기 때문이라 하지만 많은 여성이 업자에게 재료를 받아 집에서 일하거나 급여를 받고 일했으며 이런 여성들은 길드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돈을 벌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던 게 현실이었다.
여성은 특정 직종에 제한이 된 몇 가지 기록이 있다, 파리에서는 카펫 짜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여성들이 제대로 할 체력이 없기 때문이라 기록되었으며 (가금류 도살 및 판매업자들은 종종 여성들에게 그 내장을 성문 밖에 버리는 일을 시켰는데 이것은 아주 지저분하고 무거운 짐을 들어야 했지만 이 일에 대한 반대는 없었다) 파리에서는 도제를 들이거나 도제를 훈련하는 일은 과부들에게도 종종 금지되었다. 여러 길드의 조약을 보면 과부는 남편 아래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던 도제의 훈련을 완수할 수는 있으나 새 도제를 들일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또 한 양초 제조공의 과부가 숙련된 자가 아니라며 일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녀는 항소했고 다른 사람을 이해 일하거나 도제를 들이지 않으며 자식들과 재혼한 남편에게 자기의 일을 이어갈 수 없는 조건으로 일을 계속하는 것을 허가해 주었다. 같은 조건으로 묵주를 만들거나 보석을 가공하는 여성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들은 여성이 섬세한 기능을 숙달해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한편 브리스톨은 직조공 직종의 많은 남성이 일거리를 얻지 못했는데 여성이 고용된 탓으로 여겼다. 여성의 급여는 낮았으니 여성을 고용하려는 수공업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여성 급여는 남성의 2/3 정도였다. 하지만 여성의 급여가 인상될 때가 있었는데 흑사병으로 인구가 감소해 노동력이 줄었을 때였다. 모든 임금이 올랐고 여성 임금 역시 포함되었다. 하지만 여성의 임금이 올라도 남성의 임금을 따라갈 순 없었다. 흑사병 후 잉글랜드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최소 임금을 보장하기 위한 법령을 따랐고 남녀 불문하고 60세 이하의 모든 노동자는 제공하는 일거리를 받아야 했다. 이 법령을 어기는 자는 투옥되었다.
'중세 시대 여성의 모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세 도시 여성들의 교육과 여가 (0) | 2022.08.20 |
---|---|
중세 도시 여성들의 직업 3 (의료) (0) | 2022.08.19 |
중세 도시 여성들의 직업 1 (0) | 2022.08.18 |
중세 도시의 어머니의 모습 (0) | 2022.08.17 |
중세 시대 도시 여성들의 결혼과 재산 분할 (0) | 2022.08.17 |
댓글